|
|
성두리(星斗里) 이야기
이기화(고창지역학연구소장) 기자 / 입력 : 2012년 05월 21일(월) 13:38
공유 :   
|
모양성의 성머리는 북극성좌와 일치해 있었다. 성두리는 북두(北斗)와 남두(南斗)를 아우르는 중성공두(衆星拱斗) 형국의 지세를 이루고 있지만 본래는 성두(城頭)마을이었다.
고흥류씨의 입향조 유춘영(柳春英) 공의 사적비를 보면 1570년대 전라감사 박민헌(朴民獻)이 쓴 비문에 성두촌(城頭村)으로 표기한 것을 보면 이는 극명한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해 준 사적인 것이다.
성두리는 상성(上星), 중성(中星), 하성(下星)의 세 뜸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1914년 전국행정구획을 개편할 때 천북(川北)면이 고창면에 합병되면서 성두와 옥동(玉洞)을 병합하여 법정리인 성두리가 되었다.
고창읍성이 축성되기 이전의 조선 초기에 안산등(安山嶝) 허리에 기히 설기된 마을이 있었으나 고로들의 천문설에 의하면 어느 날 갑자기 벼락이 떨어져 풍비박산이 된 이후 1562년 죽계(竹溪·류춘영의 호)공의 사속(嗣續)인 류계가 진외가인 고창윤씨 윤본(尹苯·유면(柳沔)의 장인) 공의 유산을 물려받기로 외손봉사(外孫奉祠)할 때 상성에 터를 닦아 류씨촌을 조성함에 윤종손(尹宗孫·윤본의 아들)의 사위(조침(曺琛)·창령조씨 입향조)의 6세손 조의기(曺義起) 공이 성두마을의 좋은 지세를 찾아 중성에 터를 잡아 지금까지 자작일촌으로 번창하고 있다.
선지자 죽계공의 예지로 중성공두 형세의 깊은 뜻을 정립하여 대밭머리 터를 골라 지분당(知分堂)의 정자를 짓고 선비간의 진의를 소담하게 엮어내는 진솔회(眞率會)를 이어냈으니 가히 죽림칠현의 가둔지소(嘉遯之所)가 예 아니겠는가!
|
|
이기화(고창지역학연구소장) 기자 - Copyrights ⓒ주간해피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최신뉴스
|
|
고창교육, 3년째 이어지는 디지털 배움터 |
불길 앞선 용기, 대형 산불 막았다 |
고창 하전, 바지락으로 여는 5월의 오감 축제 |
고창군 고향사랑 지정기부금, 재창단 야구부에 전달 |
이나영 고창분소장, 세계적 학술지에 ‘방사선환경’ 연구 |
고창문화관광재단–석정웰파크요양병원, 치유문화 확산 맞손 |
고창군, 계절근로자 우호국과 국제 농업협력 강화 |
고창군–웰파크시티, 체육단체·자매도시 우대 협약 |
고창읍성 서문 앞 전통예술체험마을 운영 준비 착수 |
고창율계 고령자복지주택 추가 입주자 모집 |
‘신재효 고택으로의 초대’ 프로그램 본격 운영 |
정읍시, 관광두레 공모 돌입…주민 손으로 지역관광 키운다 |
“병원 아닌 집에서”…정읍시, ‘의료·돌봄 통합지원’ 모 |
정읍시, 위기 돌파 위한 도시 재구성에 나서다 |
갓 임용된 고창 신임 순경, 비번 중 절도범 검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