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행과 삶·안전 사이의 간극―고창·부안이 겪어온 ‘소외의 역사’
고창·부안은 핵발전소 건설 초기부터 지원체계에서 배제됐다. 발전소주변지역지원법·지역자원시설세 모두 ‘원전 소재 시·군’을 기준으로 설계됐고, 비소재 지역은 위험만 공유했다. 이번 시행령안도 같은 구조를 답습하고 있다. 주민들은 이를 “행정 편의가 만든 안전 불평등”으로 규정한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국내 원자력안전법령이 30킬로미터 비상계획구역을 채택한 사실은 정부 스스로 위험 범위를 확대 인정한 선례다. 그럼에도 주민수용성·지원 범위만 1990년대 기준을 고수하는 것은 “법과 과학, 행정의 불일치”라는 비판을 받는다.
고창군은 핵발전소가 없는 지자체다. 그러나 한빛원전 1호기와 직선거리 2.6킬로미터, 행정구역으로는 상하면 석남리·자룡리가 5킬로미터 안에 들고, 성내면을 제외한 13개 읍면이 30킬로미터 비상계획구역에 포함된다(부안군도 5개 면이 비상계획구역에 포함된다). 부안군은 더욱 기이한 사례다. 5킬로미터를 벗어난다는 이유로 설명회 개최 요청도 거절됐다. 고창·부안 주민이 “핵 위험의 그림자 속 투명 인간”이란 자조를 내놓는 배경이다.
한편, 5킬로미터 기준은 1990년대 초 발전소주변지역법 제정 시, 가장 높은 초기 피폭 위험이 3~5킬로미터 안에 집중된다는 국내 안전해석 결과와 당시 재정지원범위를 한꺼번에 고려해 법으로 못 박은 ‘행정·재정 편의 기준’이다. 2025월 8월 현재, 주민수용성과 지원 범위도 비상계획구역 수준(30킬로미터)으로 확대해야 하는 이유는, 위험인식·국제기군·국가경제력 모두 1990년대 비교해 달라졌기 때문이다.
주민이 제시한 세 갈래 해법―주민들이 요구하는 ‘실질적 수용성’
첫째, 임시저장시설 설치 여부를 주민투표 또는 숙의형 공론화로 결정해야 한다. 법률 용어로 ‘주민수용성’은 있어 보이지만, 시행령 안에는 주민투표·지역공론화 절차가 없다. 설명회(토론회)·공청회가 무산되면 생략할 수도 있다는 단서까지 달렸다. 범대위는 “형식적 설명회로는 50년 이상 이어질 시설을 결정할 수 없다”고 못을 박는다. 전례도 있다. 문재인 정부 당시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가 추진한 경주 사례에서는 지역실행기구를 중심으로 공론화 과정을 진행한 바 있다. 고창 주민은 “정부가 이미 해본 방식을 왜 외면하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둘째, 주민수용성·지원 범위를 방사선비상계획구역인 30킬로미터로 확대해 위험 인근 지역을 제도권에 포함시켜야 한다. 셋째, 중간·최종처분장 건설이 지연될 경우 국가의 책임과 추가 대응방안을 법령에 명문화해 영구화 우려를 차단해야 한다. 범대위는 “신뢰를 되돌려 놓지 못한다면 우리는 한발도 물러설 수 없다”라고 선을 그었다.
위험과 권리의 경계―“우리 삶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고창이 맞서는 싸움은 찬·반 구도를 넘어 ‘민주적 결정권’을 향한 투쟁이며, “우리 삶을 외부에서 결정하지 말고, 우리 삶을 결정할 권리를 최소한 동등하게 달라”는 상식적 요구다. ‘결정권’은커녕 피해당사자인 주민들에게 ‘동의권’조차 없다면, 이는 국가가 위험을 일방적으로 전가한 채 헌법이 보장한 시민권을 무력화하고, 주민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불의한 통보에 지나지 않는다. 2025년 한여름 고창에서 불붙은 충돌은 단순히 원전 인접지의 찬반 싸움이 아니다. 핵폐기물 관리체계가 민주적 절차와 과학적 안전성, 사회적 형평성 위에 다시 설 수 있느냐는 국가적 시험대다.
5킬로미터 경계는 행정 편의를 위해 그어진 선이지만, 방사능 재난(피폭 가능성)은 선을 넘나든다. 고준위방사성폐기물법령이 이러한 상식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핵발전에 대한 국가적 불신은 더 심화될 것이다. 반대로 주민동의권, 30킬로미터 범위 확대, 책임 명시를 담은 개정안이 나온다면, 정부-주민간 핵발전 갈등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생명권·안전권·자치권을 동등하게 놓을 때만, 사용후핵연료 관리 체계는 민주적 정당성과 과학적 안전성을 동시에 획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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