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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토미 야스자에몽을 내조한 부인 데루코 여사
<나카무라 상의 고창살이>
나카무라 기자 / 입력 : 2012년 09월 11일(화) 14:43
공유 : 트위터페이스북미투데이요즘에
고창고등학교가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에 관여했다가 퇴학당한 학생들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고창고 민족사료관에는 한 권의 오래된 책이 있다. 이 책은 1941년에 발행된 것이며 일본인에게 <조선은 어떤 곳인가?> 소개하였다. 이 책 속에는 어떤 낙서가 보였다. <그러한 큰 소리를 치지 마라! 언젠가 당신의 머리 위에 천벌이 내릴 것이다. 일본인과 조선인은 바로 자네가 말하는 바와 같이 동일민족이다. 그렇다고 해도 조선인이 일본인의 조상이지, 일본인이 조선인의 조상이 아니다.> 이렇게 완벽한 일본어가 책 속에 써져 있었다. 당시 고창고의 조선인 학생이 쓴 것인지 아니면 조선인 교사가 쓴 것인지?

 
   
▲ 1940년경에 데루코 여사가 그린 그림.


고창고 설립자 마쓰토미의 이념은 <조선인 자주독립 위해서는 조선인이 배워야 한다>였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의 자주독립을 말하면서 고등교육을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교장 마쓰토미의 존재가 외부로부터 방어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1926년 고창고보의 신축 교사가 완성되었고, 이때 조선총독인 사이토 마코토(斎藤実)가 완성식에 참석했다. 그때 사이토 총독은 김제의 마쓰토미 자택도 방문했다. 왜 규슈출신의 일개 개척자인 마쓰토미가 조선의 최고책임자인 사이토 총독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마쓰토미 부인 데루코 여사에 있다.

데루코 여사는 실력있는 문인이었다. 일본에는 와카(和歌)라는 전통적인 시 스타일이 있는데, 데루코 여사는 와카의 작가였다. 그녀는 와카의 시집을 몇 권이나 출판했다. 데루코 여사의 와카 스승은 사사키 노부츠나(佐佐木信綱)이다. 일본의 왕족에게도 와카를 지도했던 와카계의 제일인자였다. 사사키의 제자 중에 사이토 총독의 부인인 하루코(春子) 여사가 있었다. 데루코 여사랑 사이토 부인은 동문이었던 것이다. 데루코 여사는 다도·서예·미술 등에 다방면에서 지도자급의 실력자였다. 가족이나 신랑의 인맥을 넘어선 자신의 문화적인 소양에 의한 독자적인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데루코 여사가 남긴 수필을 통해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데루코 여사의 인맥은 조선총독부의 방침과 맞지 않은 독자적인 교육사업을 하려는 신랑 마쓰토미에 있어 큰 힘이 되었다.

데루코 여사는 몸이 약했기 때문에 조선의 생활이 어려워 거의 일본에서 생활하였다. 마쓰토미는 말이 많은 사림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글은 많이 썼다. 떨어져서 사는 아내에게 거의 매일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의 시작, 데루코 여사를 부르는 마쓰토미의 글만 봐도 그는 대단한 애처가였던 것 같다. 마쓰토미는 어느 때부터 기독교 정신을 기반으로 조선에 사업하고 싶다는 목표와 방향성을 명확히 보여줬다. <특정한 종교에 속하고 싶지 않다>는 그를 기독교에 입교시킨 사람이 바로 데루코 여사이다. 그 뒤에는 데루코 여사의 강한 결심과 의지,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있었다. 동시에 데루코 여사의 존재가 마쓰토미의 조선 사업에 향하는 마음을 지지해 주었다.

필자는 이러한 이야기를 지난주 고창고등학교의 1, 2학년 학생에게 강의했다. 올해의 광복절 전후는 근래 보기 드물 정도로 독도와 위안부 문제로 둘러싸여 한일관계가 복잡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인 강사가 한국인 학생 앞에 서면 뭘 말해도 그들의 머릿속에는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말만 도는 것이 아닐까 걱정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민족정신이 발휘하기 어려운 시대에, 민족교육을 하는 고등교육기관을 고창에 만든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했다. 이러한 시기이기에 오히려 마쓰토미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 1926년 김제 마쓰토미집을 방문한 사이토 총독.

여기 자세히 언급하지 않지만 사이토 총독은 역대 조선총독 중에서는 이색적인 인물이다. 그는 1919년 취임하고 3대와 6대 조선총독을 지냈다. 사이토는 일본해군 라인으로 원래 조선총독을 맡는 곳이 아니다. 그는 급변하는 조선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이다. 우연히 그가 총독으로 있을 때 마쓰토미는 전북에서 사업하였고, 사이토 총독이 전북에 내려온 것도 이미 총독부인과 마쓰토미 부인 사이에 교류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이토 총독은 그 후 일본의 군사사건으로 1936년 세상을 떠났다. 이미 그때는 마쓰토미도 1934년에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고창군민들과 함께 만든 고창고보는 남았다. 마쓰토미와 사이토 총독과의 기적적인 만남을 기독교 신앙이 깊은 마쓰토미 부부라면 이를 신의 뜻이라 할지 모른다.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하는 것들이 우연한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枡富安左衛門を支えた夫人 枡富照子


 高敞高等学校が日帝時代に民族運動への関与が理由で退学処分を受けた学生たちを受け入れたことは有名な話だ。高敞高等学校の民族資料館の中に、日帝時代の高敞高校の図書館の蔵書がある。日本人に「朝鮮とはどんなところか?」を紹介した1941年発行の赤い表紙の本がその中にある。開いてみると中に落書きがあった。「かかる大言を吐くなかれ。いづれかは汝の頭上に天罰が下らん。日本人と朝鮮人は正に君が云うように同一民族なり。然れども朝鮮人が日本人の祖先にして日本人が朝鮮人の祖先に非ず。」完璧な日本語で書かれていた。当時の朝鮮人学生か教師が書き込んだものなのだろうか。

 

 枡富の理念は「朝鮮人の自主独立のためには、朝鮮人が学ばねばならない」であった。日帝時代の朝鮮で何故そのような教育が可能だったのか。それは校長の枡富安左衛門が朝鮮総督府に対する防波堤の役割を果たしたからだ。1926年高敞高校の新校舎完成式典には当時の朝鮮総督である斎藤実が参席している。斎藤総督はその足で金提の枡富の自宅をも訪れている。何故九州出身の一介の開拓者である枡富と当時の朝鮮最高責任者である斎藤総督とが個人的な繋がりをもっていたのか。その理由は枡富の夫人照子女史にある。

 

 照子女史は非常な才人であった。日本には和歌という伝統的な詩のスタイルがあるが、照子女史は和歌作家であった。若い時代から始まって和歌集を数冊出版している。照子女史の和歌の師匠は佐佐木信綱という人物である。皇族にも和歌指導をしていたその道の第一人者であるが、佐佐木氏の弟子の中に、斎藤総督の夫人である斎藤春子女史がいた。照子女史と斎藤夫人は和歌の同門であったのだ。照子女史は茶道、書道、日本画などどれをとっても師範級の実力をもっていた。夫と家族の人脈だけで生きたのではなく、自身の文化的素養による独自の人脈を持っていたことが照子女史が残した当時の随筆から読み取れる。照子女史の人脈は、本人の希望と関わりなく朝鮮総督府の方針とは決して相容れない独自の教育事業を朝鮮で展開していく枡富にとっての見えない大きな力となっていた。

 

 照子女史は病弱のため日本で生活していた。枡富は言葉数は多くなかったというが、文章の中では饒舌だったようで、離れて暮す妻に非常に頻繁に手紙を送った。その手紙の書き出しの言葉からだけでも枡富氏が「愛妻家」であったことが分かる。枡富はある時期からキリスト教精神に基づいて朝鮮の事業を展開したいという方向性を明らかにした。ここにもやはり照子女史が大きく影響している。元々「特定の宗教に所属したくない」と言っていた枡富を、結婚後キリスト教に伝道したのも照子女史である。その裏には照子女史の強い決意と揺るぎない意志と篤い信仰がある。また照子女史の存在自体が韓国での事業を展開していく枡富の心を支えていた。

 

 こういった話を先日、高敞高校の1.2年生を対象に講義した。夏以降ここ数年なかったほどに「竹島問題」を巡って韓日関係の報道が荒れている。こういう状況の中で、「日本人」が前に立てば、何を語っても学生の頭の中はなにより「竹島」で一杯にな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危惧もあった。しかし日帝時代という難しい時代に、枡富が、民族教育の垣根となった学校である高敞高校の基礎を作ったという事例をもういちど再考した。こういう時期だからこそ逆にこの話をしないといけないのだろうと思い直して出発した。

 

 ここでは詳しく触れないが、斎藤実という人物は歴代朝鮮総督の中では異色の人物である。1919年からの三代、六代の総督であるが、元々斎藤実のいた海軍のラインは朝鮮総督府に繋がっていない。朝鮮事情の大きな変化の影響を受けて朝鮮に配置された人物だ。当時の首相が同じ岩手出身の原敬であったことも関係しているかも知れない。彼が赴任した時代が、たまたま枡富が全羅北道で事業展開している時代であったのだ。1936年には日本の軍事クーデター(2.26事件)に巻き込まれて斎藤実は死亡している。1934年には枡富自身も故人となった。しかし学校は残った。この歴史の奇跡的な偶然の一致を、篤実なキリスト教信者である枡富家の人々は「神の御心」と呼ぶかも知れない。世の中には私たちが自分の頭では想像できないまさかの解決法が存在するのだということを、この一連の話は教えてくれるのである。

나카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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