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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 어르신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한 인생기록집 『살아온 날이 다 노래다』가 발간됐다. 이 책은 고창 어르신 열두 분의 생애를 기록하여, 한 세기를 건너온 삶의 경험을 지역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제작됐다. 12월29일 오후 1시10분, 고창문화의전당 1층은 고창의 한 세기를 살아낸 어르신들의 숨결로 가득 찼다. 세대 간 공감과 이해의 가치를 확장하기 위해 추진된 ‘고창 어르신 인생기록 프로젝트’의 결실인 『살아온 날이 다 노래다』 출판기념회가 열린 현장이다. 고창문화관광재단 부설 고창문화도시센터가 주관하고, 고창 무장이 고향인 정명혜 광주남부대학교 교수와 박유자 사진작가가 협업해 집필한 이 책에는 만 85세 이상 어르신 12명의 생애가 구술체로 담겼다.
사투리와 숨결까지 담아낸 ‘살아있는 역사’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보릿고개 시절의 어려움, 배움에 대한 열정, 산업화의 변화 등 다양한 시대를 살아온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구술체로 담겼다. 기록을 맡은 정명혜 교수는 어르신들의 기억을 판단하거나 해석하지 않고 최대한 있는 그대로 옮기는 데 공을 들였다. 기존 문헌과 다른 기억이 있더라도 후대 연구자들을 위해 그대로 남겼으며, 어르신 특유의 말씨와 호흡, 사투리까지 살려냈다. 이는 기록이 단순히 자료를 모으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을 존중하는 일’에서 시작된다는 작가의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열두 생애가 빚어낸 한 편의 교향곡
기록집에 담긴 열두 분의 삶은 저마다 다른 빛깔의 노래가 되어 고창의 현대사를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그 서사는 크게 네 갈래로 나뉜다. 첫째는 가난 속에서도 자녀 교육에 헌신한 어머니들의 이야기다. ▲박화순 어르신은 평생을 자녀 교육에 헌신하며,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자식만큼은 반드시 가르치겠다는 의지로 살아왔다. 그는 생계가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동냥질을 해서라도 자식은 가르치겠다”는 말로 자신의 삶을 표현했다. ▲안영순 어르신 역시 가난과 역경 속에서 2남5녀를 올곧게 키워내며, 교육과 가정의 근간을 지켜낸 어머니로 남았다. 두 어르신의 삶은 자녀에게 더 나은 미래를 열어주려 했던 부모 세대의 간절한 마음을 보여준다.
둘째는 지역사회를 이끈 인물들의 기록이다. ▲반상진 어르신은 일제강점기 가족의 땅을 잃는 아픔을 겪었지만,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의학의 길에 들어섰다. 광주에서 이비인후과를 개원해 환자들에게 따뜻한 진료를 베풀었으며, 지역사회 교육과 복지에도 힘썼다. 고창남중학교와 장성고등학교를 설립해 청소년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무료진료를 이어갔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는 광주의사회 회장으로 시민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 그는 검소와 봉사를 실천하며 지역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기억된다. ▲이공진 어르신은 고창고등학교 재학 중 한국전쟁을 겪었고, 학업 중단의 어려움을 딛고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사회 경험을 쌓았다. 스물일곱 살에 전국 최연소 산림조합장에 선출되어 양묘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의료보험 제도 정착과 지역 갈등 조정에도 기여했다. 이후 고창군 노인회장을 맡아 공동체의 자존감을 높이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연규 어르신은 고창고등학교 학생으로 시작해 교장으로 은퇴하기까지 평생을 교육에 바쳤다. 그는 고창고보의 역사를 정리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지역 교육자의 표본이 되었다. ▲표을종 어르신은 동학의 정신을 직접 찾아 기록하며, 『공음, 걸음마다 천년의 이야기』를 출간했다. 그의 활동은 고창의 정체성과 민중의 역사를 후대에 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셋째는 전통의 맥을 잇는 장인들의 손길이다. ▲이갑술 어르신은 고창 한지의 마지막 장인으로, 한지 장판을 벌안에 널어 말리던 시절을 생생히 기억한다. 한때 일본에까지 수출되던 고수 한지는 산업화로 사라졌지만, 그의 기억 속에 그 시절의 풍경이 남아 있다. ▲이상영 어르신은 고창에서 태어나 평생을 판소리와 국악 교육에 헌신했다. ▲최배홍 어르신은 아버지에게 목수 일을 배우며 사찰과 정자를 지어내는 장인으로, 손끝의 기술로 마을의 기둥을 세웠다. 이들의 삶은 노동과 기술이 예술과 문화임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강인한 생명력으로 공동체를 지켜낸 여성들이 있다. 강양례 어르신은 올해 104세로, 한국전쟁 때 고창으로 피난 와 나물장사와 나무장사로 생계를 이어왔다. 백세가 넘은 지금도 공동체 정신을 지키며, 대통령 선거에도 직접 참여해 주권 의식과 책임감을 실천했다. 김정자 어르신은 여섯 분의 시부모를 모시며 집안을 지켜낸 삶을 통해 여성의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이숙례 어르신은 여성농민회 활동을 하며 젊은 세대의 귀촌 환경 조성에 힘썼고,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노력했다.
“그럭저럭 먹고 사는 게 좋은 살림”…별세한 박화순 할머니의 마지막 인사
이날 출판기념회는 박화순 할머니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며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기도 했다. 할머니는 출판기념회를 불과 일주일 앞두고 세상을 떠나, 책 속에 남은 목소리가 고창의 역사이자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생전 “그럭저럭 먹고 사는 게 좋은 살림”이라며 담담히 삶을 술회했던 할머니의 기록은 이제 후대에게 소중한 유산으로 남았다.
기억을 넘어 미래의 길을 묻다
심덕섭 군수는 발간사를 통해 “어르신 한 분 한 분의 생애는 고창 공동체의 뿌리이자 내일을 살아갈 우리 모두의 길”이라고 밝혔다. 조민규 고창군의장 또한 진정한 역사는 사람의 삶에 새겨져 있음을 강조하며, 이 책이 미래 세대에 전하는 소중한 유산이 될 것임을 확신했다. 현장에서는 책에 소개된 어르신들의 삶을 담은 사진과 영상 전시가 함께 진행되어 감동을 더했다. 『살아온 날이 다 노래다』는 독자들에게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창(窓)이 되고, 세대 간을 잇는 따뜻한 소통의 다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책은 마치 오랜 세월 풍파를 견디며 나이테를 새긴 거대한 느티나무와 같다. 나무의 결 하나하나에 새겨진 고통과 기쁨의 기록은, 이제 마을 전체를 시원하게 덮어주는 그늘이자 다음 세대가 올바르게 자라날 수 있도록 이정표가 되어주는 뿌리가 될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개인의 기억이 어떻게 한 지역의 위대한 역사가 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굽이진 세월을 노래로 승화시킨 열두 분의 이야기는 이제 고창의 정신이 되어 미래로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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