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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농촌이 직면한 가장 가혹한 현실은 ‘의료 공백’이다. 고령화가 가속화되고 인구 소멸 위기가 닥치면서, 농촌 주민들에게 병원 문턱은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높고 험난해졌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정읍시가 전국 최초로 도입한 ‘시니어닥터 지역주치의제도’는 지자체의 ‘적극행정’이 어떻게 시민의 생명권을 보호하고 지역 사회의 온기를 되살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설계의 혁신: ‘시니어닥터’로 의료의 맥을 짚다
정읍시의 ‘시니어닥터 지역주치의제도’는 단순히 의사를 배치하는 수준을 넘어, 농촌의 구조적 의료 불편을 행정적 설계로 풀어낸 혁신 모델이다. 이 제도의 출발점에는 이학수 정읍시장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이 시장은 농촌 의료 공백의 실질적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정읍아산병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임경수 원장을 직접 찾아가 지역 의료의 절박한 현실을 설명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 시장의 정책적 설득과 임 원장의 현장 공감이 맞물리며 이 제도는 결실을 맺었다. 이에 따라 단발성 진료에 그치는 방식이 아니라, 상담을 통해 상태를 파악하고, 관리로 이어가며, 필요한 경우 의료기관과 연계하는 지속적인 의료 흐름이 구축됐다. 이 과정에서 보건지소의 역할도 달라졌다. 보건지소는 단순 진료 공간을 넘어 주민 건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생활 밀착형 의료 플랫폼’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행정의 설계가 현장의 기능 변화를 이끈 셈이다.
현장의 변화: “제도는 종이 위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정책이 아무리 훌륭해도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임경수 고부보건지소장은 지난 1년여간 근무하며 “제도는 실천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다. 제도가 주민 삶에 맞게 돌아가도록 세부 흐름을 다듬었다. 현장은 설계가 그대로 적용되기 어려운 지점이 많았다.
가장 큰 난관은 주민들과의 소통 방식이었다. 고령의 주민들은 자신의 증상을 병명으로 설명하기보다 “어지럽다”, “잠이 안 온다”, “숨이 찬 것 같다”처럼 ‘생활 언어’로 표현하는 경우가 잦았다. 초기에는 상담 시간이 길어지고 전달 과정에서 혼선이 생기며 진료 연계가 매끄럽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임 지소장은 상담 흐름을 주민 눈높이에 맞춰 정리했다. 반복 상담을 통해 증상이 언제부터, 어떤 상황에서 심해지는지를 차분히 기록했다. 이 과정은 의료진에게 전달되는 정보의 질을 높였다. 그 결과 진료 연계의 정확도와 속도도 함께 개선됐다.
지표의 증명: 처방 품목 확대와 의료 접근성 강화
고부보건지소에서 일어난 가장 실질적인 변화는 의료 접근성의 문턱을 낮춘 것이다. 고부 지역은 인근에 약국이 없는 농촌 특성상, 처방을 받아도 약을 구하기 위해 추가 이동이 필요했다. 기존에도 보건지소를 통한 일부 처방약 제공은 가능했지만, 구비 약품 수가 제한돼 다시 이동해야 하는 경우가 반복됐다. 임 지소장은 진료 흐름과 주민 이용 실태를 점검했다. 그 결과 보건지소 내 처방약 구비 품목을 기존 20종에서 36종으로 확대했다. 이 조치로 진료 후 곧바로 필요한 약을 제공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
변화는 수치와 체감으로 이어졌다. 임 지소장 부임 이후 고부보건지소의 처방 약품 활용 건수는 이전보다 큰 폭으로 늘어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단순 상담에 머물던 진료는 복약 관리와 질환 관리로 이어지는 구조를 갖추게 됐다. 즉, 보건지소가 ‘진짜 치료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주민 반응도 분명했다. “진료를 받고 바로 약을 받을 수 있다”, “몸이 안 좋아도 병원에 가는 부담이 덜하다”는 이야기가 현장에서 나왔다. 의료 접근성이 일상의 범위 안으로 들어왔다는 신호였다.
제도의 핵심은 지속성에 있다. 만성질환 관리는 한 번의 방문으로 끝나지 않는다. 임 지소장은 일정 주기로 건강 상태를 점검하고, 필요한 경우 상급 의료기관 연계를 검토하는 흐름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보건지소는 ‘내 이야기를 기억해주는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제도에 대한 신뢰가 쌓일수록 주민의 참여와 협조도 늘어났다. 행정 설계와 현장 실행이 맞물리며 정책 효과가 확장되는 구조가 형성됐다.
신뢰의 선순환: ‘수상’에서 ‘기부’로 이어진 품격
정읍시의 이러한 노력은 외부의 높은 평가로 이어졌다. 주민 만족도와 진료 연계 실적 등 정량·정성 지표 모두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두며 중앙부처로부터 “현장에서 작동하는 적극행정”의 대표 사례로 인정받았다. 정읍시는 임경수 고부보건지소장을 ‘2025년 정읍시를 빛낸 최고의 적극행정 유공공무원’으로 선정하고, 포상금 100만원을 지급했으며, 임경수 지소장은 전액을 이웃돕기 성금으로 선뜻 기탁했다. 임 지소장은 “포상은 개인에게 주어졌지만, 성과는 시민과 현장이 함께 만든 것”이라며 “작게나마 이웃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미래의 비전: 시민 체감형 행정의 완성
정읍시의 ‘시니어닥터 지역주치의제도’는 마치 마을 구석구석을 밝히는 ‘가로등’과 같다. 이전에는 아파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어둠 속을 헤맸던 주민들에게, 이 제도는 집 근처에서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밝은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다. 이학수 정읍시장은 이번 사례를 통해 “정책의 목표는 결국 시민의 삶”임을 강조했다. 이 시장은 “시니어닥터 지역주치의제도는 농촌 현실에서 출발해 시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꾸기 위해 설계한 최고의 정읍형 적극행정”이라며 “정읍시는 앞으로도 시민 체감이 분명한 정책을 적극 발굴하고, 그 성과가 지역 공동체의 신뢰로 이어지는 적극행정의 선순환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농촌 의료 공백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정읍시가 보여준 혁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니어 의사의 경험, 행정의 설계, 현장의 꾸준한 실행이 맞물리며 의료는 다시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정읍에서 시작된 이 선택은 농촌 의료 정책의 한 기준으로 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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