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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가 고부봉기의 역사적 가치를 알리고 특별법 개정에 뜻을 모으는 에스엔에스(SNS·온라인소통망) 릴레이 캠페인을 시작했다. 첫 참여자인 이학수 정읍시장은 10월7일 개인 에스엔에스에 ‘1894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은 정읍 고부농민봉기’라는 문구와 동학농민명예회복법(이하 특별법) 개정을 촉구하는 팻말을 든 사진을 게시했다. 이어 다음 참여자로 이복형 정읍시의회 의장을 지목했다.
현행 동학농민명예회복법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1894년 3월의 1차 봉기와 9월의 2차 봉기를 중심으로 규정한다. 특히 1차 봉기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봉기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로 규정하고 있다. 고부봉기는 1894년 음력 1월10일(양력 2월15일), 무장기포는 음력 3월20일(양력 4월25일) 일어났다. 따라서 특별법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무장기포로 보고 있으며, 고부봉기를 참여자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서 제외하고 있다. 정읍시는 “이 규정이 고부농민봉기의 역사적 위상과 참여자의 명예를 충분히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보고, 특별법 개정의 필요성을 알리고 있다.
이번 참여 잇기는 주요 인사와 기관·단체장, 시민 등이 같은 문구가 담긴 팻말을 들고 찍은 인증 사진을 개인 인터넷소통망에 게시한 뒤 다음 참여자를 지목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참여자들이 각자의 교류 관계를 바탕으로 참여를 이어가며 고부봉기의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릴 계획이다. 시의 각 부서도 담당 기관·단체와 협력해 홍보활동을 펼치고 참여를 늘릴 방침이다. 이를 통해 고부봉기와 특별법 개정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공감대를 넓혀나갈 계획이다.
시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가치를 알리고 ‘사람이 하늘’이라는 혁명정신과 자유·평등의 가치를 계승하기 위한 홍보활동과 혁명정신을 기리는 사업도 이어가고 있다. 이학수 시장은 “동학농민혁명이 정읍 고부농민봉기에서 시작됐다는 역사적 사실을 널리 알리고 올바르게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번 참여 잇기가 고부농민봉기의 가치를 되새기고 특별법 개정에 뜻을 모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한편, ‘동학농민혁명’과 ‘동학농민전쟁’이 같은 사건을 가리킨다고 볼 때, 그 기점을 놓고는 고부봉기부터 이어지는 연속성을 강조하는 견해(고부봉기론)와 무장기포를 전국적 혁명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무장기포론)가 맞서고 있다. 현재까지 무장기포론이 특별법과 교과서 등에 반영되면서 통설로 자리잡고 있다. 무장기포론은 대체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계기)은 정읍의 고부봉기, 본격적인 제1차 봉기의 출발은 고창의 무장기포’라는 형태로 유통되고 있다. 여기에 대해 정읍시는 앞으로 고부봉기론을 통설화하고, 특히 특별법에 있는 ‘1894년 3월’이란 문구를 ‘1894년 1월’로 바꾸고 싶은 것이다. 결국 무장기포론을 고부봉기론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다수 전문가의 동의, 다수 국회의원의 동의가 필요하다.
고부봉기론
고부봉기를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으로 명시한 연구자로는 박대길(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전 정읍시청 동학농민혁명선양담당), 성주현(전 숭실대·청암대 연구교수), 강효숙(전 청암대·한양대 연구교수), 성강현(동의대 겸임교수) 등이 있다. 조광환(동학역사문화연구소장)과 유영렬(전 국사편찬위원장)도 학술대회에서 같은 방향의 견해를 밝혔다. 다만 이들의 논거와 ‘시작’의 범위는 조금씩 다르다.
박대길은 ‘사전 계획과 사건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박대길의 해석에서 고부봉기는 조병갑의 수탈에 즉흥적으로 반응한 사건에 머물지 않는다. 사발통문이라는 거사계획을 바탕으로 관아를 점령했고, 이 사건이 지도자와 농민들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그는 고부봉기에서 시작된 운동이 무장에서 세력을 모으고 백산에서 혁명군의 대오와 명분을 갖췄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무장기포를 별도의 출발점으로 삼아 고부봉기를 혁명 이전으로 분리하는 해석에 반대한다.
성주현은 ‘해산이 곧 운동의 소멸은 아니다’라는 점에 무게를 둔다. 성주현은 고부봉기가 끝나고 무장기포가 새로 시작됐다는 해석에서 ‘완전 해체’라는 판단을 문제 삼는다. 전봉준 등 지도부가 남아 무장에서 재봉기를 준비했다면 인적·조직적 연속성이 유지됐다고 봐야 한다는 논리이다.
강효숙은 ‘지역적 성격을 띠었다고 혁명에서 제외할 수 없다’고 본다. 강효숙은 사발통문에 나타난 고부성 공격, 전주영 함락, 서울 진출이라는 공간적 확대 구상에 주목한다. 고부봉기가 지역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그 계획의 첫 단계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일본측 자료에 기록된 봉기의 원인, 참여자와 지도자, 목적도 이후 농민전쟁과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고부봉기를 농민전쟁의 시작이자 첫 단계로 봐야 한다는 입장을 명시하고 있다.
성강현은 ‘고부 단계부터 동학의 조직적 행동이었다’고 주장한다. 성강현은 전봉준이 고부의 행동을 ‘기포’라고 표현한 점, 사발통문에 동학교단의 용어가 등장하는 점, 백산대회의 지휘체계와 격문에 동학의 성격이 드러나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 또 3월 하순 백산대회에서 발표한 격문의 날짜가 1894년 1월로 적혔다는 점을, 혁명 참여자들이 고부에서 시작된 운동으로 인식했다는 근거로 해석한다.
논문 외에 확인되는 연구자들의 발언도 있다. 조광환은 사발통문 거사계획과 고부봉기가 치밀하게 준비됐으며, 동학교단 지도자 최시형과의 관련성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근거로 고부·무장·백산을 하나의 연속된 과정으로 설명했다. 유영렬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고부봉기를 전체 동학농민운동의 첫 단계로, 무장기포를 제1차 혁명전쟁의 출발로 구분했다. 무장기포의 역할을 인정하면서 혁명 전체의 범위에 고부봉기를 포함하는 견해이다.
무장기포론
무장기포를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보는 대표 연구자는 신용하(서울대 명예교수)와 배항섭(성균관대 교수)이다. 두 사람은 무장기포에서 지역적 저항이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전환됐다는 점을 중시한다. 김양식(동학농민혁명연구소장)과 이이화(1937~2020·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도 무장포고문의 선언적 성격을 근거로 무장기포론을 옹호했다.
신용하는 1985년 발표한 ‘갑오농민전쟁의 제1차 농민전쟁’에서 무장기포를 제1차 농민전쟁의 출발점으로 설명했다. 그의 연구에서 중요한 논거는 무장포고문(무장창의문)의 발표 시점과 운동 목표의 확대이다. 무장창의문이 음력 3월20일 봉기 때 발표된 것으로 보았으며, 전봉준이 무장에서 독자적인 남접도소를 설치한 것은 동학 조직을 국가·사회 개혁운동에 활용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했다. 창의문이 특정 고을 수령의 수탈을 넘어 중앙과 지방의 지배층 전체를 비판하고 전국적인 참여를 촉구했다는 점을 중시했다.
배항섭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변혁 구상이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실행된 시점을 무장기포로 본다. 그는 1892년경부터 이어진 변혁 세력의 여러 구상과 시도가 무장기포에 이르러 결실을 보았으며, 무장포고문이 농민전쟁의 시작을 알렸다고 설명했다. 반면 고부봉기는 그 과정에서 일어난 지역적 봉기로, 아직 본격적인 전국 항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입장을 표했다. 또한 무장포고문의 발표 시점과 장소에 관한 이해가 한우근의 선구적 연구를 거쳐 신용하의 연구에서 정립됐다고 설명하며, 이에 반대하는 일부 해석의 사료 활용과 논리 전개를 비판했다.
김양식은 무장포고문이 갖는 ‘시작을 알리는 선언’의 성격을 강조했다. 그의 논거는 무장포고문 선포를 본격적인 농민전쟁의 개시 선언으로 본다는 것이며, ‘무장은 동학농민전쟁이 시작된 곳’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이화는 창의문이 전국에 반포됐다는 점과 그 상징성을 들어, 무장기포는 ‘지역의 봉기가 전국적인 운동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라는 점을 중시했다. 즉, 고부봉기와 구분되는 전국적 혁명의 출발을 무장기포에서 찾는 입장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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