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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섭(원자력안전방재연구소장)
최근 한빛원전과 고리 2호기 수명연장 과정에서 드러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방사선환경영향평가에서 사고관리계획을 근거로 사고 시나리오 자체를 제거했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한 판단 오류가 아니라 한국 원전 규제 체계에서 ‘안전철학’이 실종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원자력안전위원회도, 사업자인 한수원도 안전을 기술 검토의 하위 항목으로만 취급하고 있으며, 위험을 과학적으로 드러내고 사회가 판단하도록 하는 규제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방사선환경영향평가는 원전 사고가 지역사회와 환경에 미칠 결과를 사전에 공개하고 검증하는 제도이다. 즉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든 작든, 발생했을 때의 피해 규모가 감당 가능한 수준인지 따져보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다. 그러나 최근 심사에서는 “사고는 사고관리계획으로 통제 가능하다”는 논리를 앞세워 사고모델 자체를 평가 범위에서 빼버렸다. 사고를 평가하는 제도 안에서 사고를 삭제한 셈이다. 이는 환경영향평가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무력화한 것이며, 과학적 검증 대신 행정적 선언을 우위에 둔 위험한 선례다.
사고관리계획이 있으니, 사고는 발생해도 피해는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이 과정에서 운영 주체인 한수원도, 규제기관인 원안위도 ‘안전철학’에 기반한 판단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수원은 “사고관리계획이 있으니 사고는 발생해도 피해는 없다”는 식의 공학적 낙관주의를 그대로 제출하고 있고, 원안위는 그것을 규제라며 승인한다. 사고관리계획은 사고 이후 피해를 줄이기 위한 대응 매뉴얼일 뿐, 사고가 환경적으로 무해하다는 과학적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문서를 사고 평가 삭제의 근거로 활용하는 것은 “소화 장비가 있으니 화재는 평가하지 않아도 된다”는 궤변과 다르지 않다.
원안위가 이런 판단을 내린 이유는 규제를 운영의 영역에 종속시키는 한국 원전 행정 관행에 있다. 규제기관의 출발점은 “운영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기관”이 아니라 “운영의 위험을 검증하고 통제하는 사회적 감시자”여야 한다. 그러나 국내 원전 규제 방식은 사업자 제출 문서를 검토하고 요건 충족 여부를 체크하는 행정적 심사 모델에 갇혀 있다. 사고의 불확실성을 전면에 놓고, 최악 가능성을 평가해 국민 앞에서 위험의 크기를 설명하고 판단받는 안전철학의 기반이 부재한 것이다.
한수원의 기술적 형식논리에, 규제기관인 원자력안전위원회도 ‘맞장구’
한수원 역시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원전은 상업설비이면서 동시에 방사성 물질을 수십 년 이상 저장하고 유지해야 하는 국가 위험 자산이다. 그렇다면 운영자와 원안위는 ‘전력 생산’보다 ‘위험의 관리’를 근본 존재 이유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사업자의 논리는 “설계 기준을 만족한다”, “코드 계산은 기준 내 결과를 보인다”는 기술적 형식논리에 머무르고 있는데 규제 기관인 원안위도 맞장구를 치고 있다. 사고의 사회적 피해, 장기 환경 부담, 책임 범위, 지역 공동체의 위험 인지 수준 등 운영 시스템이 바라보아야 할 인간적·사회적 측면은 어디에도 없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국제 기준은 명확해졌다. 원전 안전은 “기술 위험을 줄이는 문제” 이전에 “불확실한 위험을 사회가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철학의 문제다. 그래서 유럽, 미국 등은 규제의 최우선 기준을 “사고를 숨기지 않고 테이블 위에 올려두는 것”으로 두고 있다. 사고통제능력이 불확실하면 설비 대신 운영·조직문화·정보공개 절차가 강화된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사고가 발생한다는 가정을 불편해하고, 사고관리계획이 있으니 평가는 생략한다. 위험을 드러내기보다 감추고, 국민 앞의 설명 책임보다 서류 완결성을 우선한다. 이것이 바로 안전철학 부재의 전형적 징후이자, 과학적 기술평가에 있어 국제적인 수치이다.
“책임있는 검증절차, 사고를 숨기지 않는 안전철학, 제대로 운영할 제도적 의지”가 필요
이러한 문제는 기술의 부족 때문이 아니다. “철학의 빈 자리” 때문이다. 의학에서 의사가 단순한 치료 기술 이전에 생명 존중을 바탕으로 진료하듯, 원전 운영과 규제 역시 기술보다 국민의 생명과 환경을 우선한다는 가치 선언이 있어야 한다. 그 철학이 확립되어 있을 때만, 사고관리계획은 사고의 안전성을 보증하는 문서가 아니라 “비상시 위험을 줄이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제자리를 찾게 된다.
수명연장 심사에서 요구되는 것은 장비 계산 결과가 아니라 “국민 앞에서 위험을 어떻게 설명하고 책임질 것인가”에 대한 답이다. 한수원도, 원안위도 지금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철학이다.
사고를 평가 단계에서 삭제한 뒤 “안전하다”고 결론 내리는 규제는 규제가 아니다. 그것은 위험을 감추는 행정이며, 국민을 배제한 기술 권위의 자기만족일 뿐이다. 국민이 원전 수명연장을 신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계산이 아니라 책임 있는 검증 절차, 사고를 숨기지 않는 안전철학, 그리고 그것을 운영할 제도적 의지다.
안전을 다루는 나라라면, 이것이 먼저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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