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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은 의향의 고장이다”
<특집>고창의 항일운동
안상현 기자 / 입력 : 2012년 08월 27일(월) 10:42
공유 : 트위터페이스북미투데이요즘에
   

고창은 일제식민지 당시 항일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50여년 넘게 지역의 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하며 향토사학자로 활동해온 이기화 고창지역학연구소장(전 고창문화원장)을 만나 고창군 항일운동사에 대해 듣는다.

   
# 의로움을 가능하게 했던 풍요로움


고창은 의향의 고장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의병활동이나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민족교육 등을 통해 의로움을 실천해나갔다. 이러한 의로운 활동들이 가능했던 것은 지리적으로 넓은 농토와 산, 그리고 바다가 함께 어우러져 있어 지역이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특히 5만석 이상의 대부호는 없었지만, 1천석거리 이상의 중부자가 30여세대 이상 있어서 이러한 지역의 경제적 여유로움이 판소리나 농악 등 풍류문화가 발달했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의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1919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3.1운동)이 일어난 이후 김구 선생 등이 중국 상해(당시 중국 외교도시)로 망명해 임시정부를 만들었는데, 당시 이 임시정부를 돕기 위한 후원단체로 대한독립애국단이 전국적으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국내에서 부호들을 설득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일을 했는데, 당시 고창에서는 강대영이 대한독립애국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그는 지역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어서, 집안 형님이었던 강대직을 통해 고창의 30여 부자들과 연계를 맺었으며, 그를 통해 독립운동자금이 모금됐다. 그렇지만 아무리 부자라고 하더라도 매달 돈을 요구하면 뜻이 있어도 매번 참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이 고창의 경우는 큰부자보다는 중부자가 많아 자금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많았고, 모금 또한 지역별로 돌아가며 자금을 모금했기 때문에 부호들도 큰 부담 없이 독립운동자금을 낼 수 있었다. 여기에 지역 내에서는 성내의 근촌 백관수 선생 등 선비들을 중심으로 한 흥동장학계가 활발하게 장학사업을 진행했는데, 사실 이 장학계도 겉으로는 장학사업을 하는 척 하면서 일본군 모르게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던 곳이었다.

이렇게 지역의 부호들과 선비들이 독립운동자금 모집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결과, 당시 상해 임시정부에서 통계를 내보면 전국에서 독립운동자금이 호남일대에서 가장 많이 모금됐는데, 그중에서도 모금액이 고창이 가장 많아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 장성 기씨들의 선비정신과 고창의 의로움이 만나 의병활동으로

   
▲ 성재 기삼연 의병장
전국에서 독립유공자가 제일 많은 곳은 임실이고, 그 다음으로 많은 곳이 고창이다. 그런데 임실과 고창이 다른 점은, 임실은 1919년 3.1만세운동 때 한마을 주민들이 한날 한시에 만세를 불러 독립유공자가 되었다는 것이고, 고창은 구한말 을사조약 때부터 꾸준히 의병조직 및 개인의병 활동 같은 무장항쟁을 통해 독립유공자가 형성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장성 기씨들과 연관이 깊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조 중기(중종, 명종)때 김하서 대감과 함께 동시대에 살았던 호남을 대표하는 기대승이라는 대학자가 장성에 살았는데, 19세기(1900년대) 들어와 그의 후손 노사 기정진의 손자인 송사 기우만이라는 사람이 호남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또
   
▲ 도경 박경래 의병장
그의 영향을 받은 그 집안의 성재 기삼연이라는 사람이 정미년(1907년)에 의병부대를 조직해 장성과 문수산을 오가며 게릴라식 전법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이때 그 휘하에서 천보총으로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며 영향력을 발휘했던 고창출신 도경 박경래 포사대장이 ‘장성은 장소가 협소하니 고창 문수산을 본부로 정하자’고해서 문수산 일대가 기삼연 의병부대의 근거지가 됐다. 당시 기삼연 부대의 의병 중 7할(70%)가량이 고창사람이었던 영향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장성, 영광, 고창, 부안을 주무대로 기삼연 부대가 활발하게 의병활동을 전개한다. 이후 기삼연 의병장의 뒤를 이어 고창사람들인 박경래와 김공삼이 차례로 의병장이 되는데, 이러한 장성 기씨들의 의로운 맥이 고창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당시 고창의 고수와 신림 등지에 장성에서 넘어온 기씨들이 많이 살게 됐으며, 이번에 런던올림픽에서 양궁으로 금메달 2관왕에 오른 고창출신 기보배 선수도 바로 이 장성 기씨의 후손이다.

# 나라가 어려울 때 의기를 발휘했던 고창출신 의병장과 독립운동가

   
▲ 김승옥, 은규선, 신기업의 결의동맹서

1910년 경술합방(한일합방) 이후, 당시 고종의 밀명으로 지하 독립운동 비밀조직인 대한독립의금부가 만들어진다. 이때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의금부장으로 추대되고, 그의 수제자였던 고창출신 수남 고석진이 총참모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했다. 또 고석진과 함께 고창출신으로 의병활동을 했던 최전구는 대한독립의금부 순찰사(지금의 순회대사)로서 각 나라 대표들을 만나며 대외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그는 일제치하에서도 세금 한푼 안내고, 일본음식은 쳐다보지 않을 정도로 의기가 높아, 그의 장례 때 흰옷을 입고 그를 따르는 무리가 고창에서 성송까지 약 8km가량의 줄을 이었다. 한편 최전구 순찰사가 기록한 남정록(총5권)이라는 일기가 현재 남아있는데, 이 일기는 1894년 갑오동학혁명 때부터 1918년까지의 상황을 일기로 기록한 것이어서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이외에도 앞서 말한 대한독립애국단원이었던 강대영은 김영백 의병부대의 부대장으로, 유장렬은 이성룡 의병부대의 부대장으로 활동했으며, 공음의 정대홍은 독립적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해 1909년까지 의병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성씨별로 보면 고창에서 독립운동을 제일 많이 한 집안은 장흥 고씨, 광산 김씨, 진주 정씨, 고흥 유씨 등의 순이며, 특히 이 장흥 고씨는 60여명의 고창독립유공자 중에 10여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올 정도로 독립운동에 많이 참여했던 집안이다.

   
▲ 고창청년회관 터 표지석(모양성 대형주차장 동쪽편)


# 일제시대 고창의 민족저항운동

이후 고창의 독립운동사에서 3.1운동사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고창현에서는 김승옥, 오동균, 김창규의 주도로 모양성에서, 무장현에서는 김영완, 김용표, 김두남의 주도로 무장장터에서, 흥덕현에서는 이종주, 이대성, 유판술의 주도로 현재 성내 면소재지에서 만세운동이 이뤄졌다.

고창에서 3.1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고창청년회의 역할이 컸다. 1918년 김승옥, 은규선, 신기업은 당시 혈서로 결의동맹 맺고, 고창청년회를 만들었는데, 신기업은 자금을, 은규선은 참모역할을, 김승옥은 고창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앞장을 섰다. 또 이들은 부호들의 도움을 얻어 200평 규모의 고창청년회관을 짓고, 노동운동(전국적으로 제일 빨랐다고 한다)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야학을 열어 지역을 의식화시켜나갔으며, 고창의 부호들을 설득해 당시 30만원이라는 거금을 만들어 폐교되던 부안의 오산고보를 인수해 민족교육의 요람인 고창고보(1922년)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러한 지역적 의식 속에 세워진 고창고보는 일본역사 대신 조선의 역사를, 일본어 대신 한글교육을 진행하면서 민족교육을 진행해나갔다. 당시 나라가 일제치하에 있었지만, 일본교사를 배척운동으로 쫓아버릴 만큼 고창사람들이 워낙 억세다보니 일본에서도 고창고보 만큼은 묵인해줄 정도였다. 이러한 여건 속에 광주학생운동 사건의 연맥으로 고창에 독서회가 만들어져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지역의 저항의식을 길러낸다. 우리지역의 마지막 항일운동으로는 군산비행장 사건을 들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일본이 군산에 비행장을 만들기 위해 전북지역의 모든 학생들을 동원했는데, 당시에도 고창고보생들은 일본에 비협조적이고, 강한 적개심까지 드러내며 저항의식을 보여 총칼로 무장한 일본군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당시 고창고보생들이 밤에 일본군과 벌였던 석전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고창은 고려시대에 벼슬을 했던 사람도 많았고, 사회적 활동도 활발했던 곳이다. 그런데 고려가 망하면서 ‘불사이군’의 충절의식으로 대부분이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생활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선비의식을 지켜갔다. 또한 자주의식과 주체성이 강하여 위기 앞에서는 강한 응집력으로 민족정신을 드높였다. 특히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사건 때에는 고창의 저력과 기질을 유감이 발휘했다. 이렇게 고창에는 많은 의인·열사들이 있었기에 의향의 고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안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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