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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고등학교와 고창고보
연정 기자 / 입력 : 2011년 02월 22일(화)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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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정 김경식
연정교육문화연구소장

고창읍 성산기슭에 묵묵히 자리 잡고 있는 고창고등학교, 동교는 도내 다른 고등학교처럼 ‘공립’이라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지만 군 단위 고등학교로서는 성적이 아주 우수한 학교라는 점과 본관 전면과 교문 앞 현수막에 ‘민족교육의 산실, 인재양성의 요람’이라는 큼직한 글씨가 쓰여 있다는 것이 다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학 입시에 매달리고 세칭 국내 일류학교로 지목되고 있는 S, K, Y대 등에 합격하면 교문 앞에 합격자의 이름을 대문 짝 만하게 쓴 현수막을 펄럭이게 하고 있는 점은 다른 고등학교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행위를 볼 때 같은 대학이지만 이른바 명문대학이 아닌 지방대학이나 전문대학에 합격한 학생들의 명단은 챙기지 않고 있으니 명색이 명문 민족사학의 전통을 잇는 학교로서 한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런 것은 이른바 일류대학에 합격하지 못한 해당 학생들과 그 학부모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격의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런 경우에서도 한국교육 문제점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

필자는 연전에 출간한 졸저 『한민족 교육문화사』에서 민족사학 고창고등보통학교(高敞高等普通學校)를 한국 교육학술서로서는 처음으로 소개한 바 있다. 동 고창고보는 지금의 고창고등학교 전신이다. 이 양자의 학교는 제도적으로 보면 전자는 일제 강점기 조선교령에 의하여 성립되고 후자는 광복 후 미군정령, 우리의 교육법령에 의하여 고창고보가 계속성을 유지하면서 다만 공립(公立)으로 전환되었을 뿐이다. 그러기에 민족사학 고창고보의 전통은 그대로 유지되어 오고 그 교사, 그 교가를 애창하고 졸업 횟수가 그대로 연속되고 있는 것 이다. 그리고 지금 고창고·중 총동창회는 고창중학교 졸업생 까지 포함시키고 있지만 엄격히 말하면 현 고창중학교 제2회 졸업생까지만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고창중 1, 2회 졸업생이 원래의 고창중학교에 재학할 때 중·고등학교와 중학교로 분리되었고 당시 중학교 1, 2학년은 중·고 분리 후 고창중에서 재학하다가 제1회, 제2회 졸업생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창중학 제3회 졸업생부터는 고창고등학교로 진학한 자 외에는 고창고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할 것이다.

고창고의 전신인 고창고보의 역사는 일본인 마스도미가 애당초 부안면 오산에 서기 1912년 설립했던 ‘흥덕학당’이 발전하여 서기 1919년 4월 성립을 본 오산고등보통학교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마스도미가 동교를 설립한 것은 덴마크의 구룬드비히가 설립한 고등공민학교를 모델로 하여 한국의 농촌을 개발하려 했다. 고창고보의 설립은 이 오산학교의 경영 유지가 곤란한 것에서부터 연관된다. 당시 마스도미가 동교의 운영이 곤란하여 고창군내 유지들에게 인계하기로 한 데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당시 오산고등보통학교장이었던 양태승은 당시 고창군수 천장욱, 군내 유지 강대직, 김재종, 오자환, 이형승, 이휴열, 최용균, 홍종철 등의 지지와 찬동을 얻어 서기 1922년 2월 2일 고창군민대회를 열고 동교의 인수 및 학교 설립자금 30만원 염출에 대한 방법으로서 군내 재력가의 특별한 희사와 군민으로서 군내에 소유한 토지의 법정지가 100분의 6.25%, 즉 백 원에 대하여 6원 50전이라는 근거가 산출되어 학교 기금 30만원, 교사건축비 5만원 계 35만원을 조성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동년 2월10일 에는 고창고보 유지문제를 위한 존치·유지위원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자금 조성에 있어서 특기할 것은 홍종철은 군내 11명의 재력가가 각자 출연하기로 한 자기의 할당 거출금 외 자금조달 대상에서 영세거출액자 3천명 분을 단독 부담했다는 사실이다.

오산고등보통학교 인수 당시 고창군민은 14만여명이었고, 그 중 거출금 중 소유 토지 법정지가 비율에 따라 기부한 사람이 5,500명에 달했으니 말하자면 고창고보 교주는 5천 5백여 명이다. 당시 국내 사학의 몇몇 경우를 보면 민간인이 경영하는 사학으로는 서울의 중앙고보, 휘문고보 등은 모두 개인 재산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정주의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이 경영하였으나 재정부족으로 평북일대의 지방유지가 그때 그때 협조하여 늘 불안한데다가 남강의 독립운동 참여로 학교운영만은 그 존폐가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면 고창고보의 설립은 민간사학으로서는 퍽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창군민은 서기 1922년 4월 1일 사립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였던 바, 당시 학생 수는 4학년까지 180명이었다. 그리고 초대 교장으로 양태승이 그대로 교장대리에 임명되었다. 동년 6월 3일 고창고등보통학교는 고창읍으로 이사하였다. 동교는 처음에는 향교의 명륜당과 사마재를 이용하였으나 학생 수용에 퍽 어려움이 많았다. 다음 해 4월 1일 학급편제는 제1학년에서 제5학년까지 처음으로 갖추고 교원의 충원, 설비의 확충 등으로 면목을 일신하였다. 동년 7월 1일자로 본교 기본재산으로 재단법인 고창고등보통학교의 설치인가를 받고 서기 1923년 7월 7일 교명을 정식으로 ‘고창고등보통학교’로 개칭하여 인가받고, 최초 본관 신축의 준공을 보게 된 것은 서기 1925년 6월이었다. 최초의 졸업생 7명을 배출한 것은 서기 1924년 3월이었다.

동교는 일제 강점기에 민족사학으로서 민족교육 즉 민족의 주체성과 반일교육에 교사와 학생이 일체가 되었다. 이러한 정신은 그 뒤 6·25 한국동란 중 어린 학생들의 호국(護國)을 위해 선운사 작전 참여로 이어졌다. 고창고보 발전과정에서 특기할 것의 하나는 서기 1934년 전주신흥학교 전 교사와 학생의 전입 사건이다. 당시 신흥학교는 일제 신사참배 강요에 거부하자 폐교 당하여 동년 9월 25일 고창고보에 통합하였다. 신흥학교 교사와 학생이 고창으로 오던 날은 고창고보 교사와 전교생이 길 양쪽에 도열하여 박수로 환영하였다. 일제 강점기 민족사학을 거론할 때 ‘남선에 고창고보, 북선에 오산고보’라 하였다. 필자는 서기 1990년대 말, 한 조문 석상에서 오산고보 출신 80대 노인을 맞난 일이 있다. 그런데 옆에서 나의 사제(舍弟)가 필자를 가리키며 저의 백형은 고창중 출신이라 하자, 오산고보 출신 그 분은 생전 처음 보는 필자를 “김 동지”하며 덜컥 포웅해 주던 일이 있었다. 오산고보 출신이 왜 고창중 출신을 “김 동지”하며 포웅했을까?

당시 고창고보나 오산고보 등 민족 사학은 학생들에게 반일과 민족독립의 혼을 인식시켜 주었으며 일제 식민지교육의 반대 내지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였음은 동아일보 등 언론에서도 수 없이 소개 되었다. 그 당시 민족사학은 학생들을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을 한 일도 없고 설령 본교생이 이름 있는 대학에 합격했다 해서 교문 앞 대문짝만한 현수막에 합격한 학생의 이름을 써 본 일도 없었다. 21세기에 접어든 오늘의 교육은 일제 강점기의 민족교육과는 그 궤를 달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민족사학 고창고보의 전통을 잇는 공립화한 고창고등학교는 교육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 것인가? 말하자면 민족사학의 전통을 어느 방향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인가? 그것은 고창고와 고창중·고 총동창회가 안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고창고 본관 전면과 교문 앞 현수막에 커다랗게 써 붙여 놓은 ‘민족교육의 산실, 인재양성의 요람’이라는 뜻을 학교 측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고 또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 것을 알고 싶다.

<편집자 주> 김경식 저, 『한민족교육문화사』(교육과학사, 2008, 크라운판 1,250면)는 서기 2009년 대한민국 학술원 기초학문분야 우수도서로 선정된 교육사학계의 최근 대역작이다.

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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