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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뎅이의 추억
연정 기자 / 입력 : 2011년 02월 28일(월) 11:48
공유 : 트위터페이스북미투데이요즘에

   

연정 김경식
연정교육문화연구소장

언제나 음력 정월 이 맘 때면 왕뎅이를 떠나 뒷개(후포)에서 하선하여 집을 향하던, 그 눈보라 휘몰아치던 사슬터 길, 그 길이 떠오르곤 한다.

우리가 왕뎅이로 이사한 것은 광복 이듬해인 서기 1946년 봄이었다. 우리네에서는 왕등도를 흔히 ‘왕뎅이’로 불러왔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왕뎅이는 격포에서 서남방향으로 34Km 지점에 위치한 자그만한 섬이다, 우리가 이사갈 때는 왕뎅이에는 십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지금은 무인도로 무성한 수풀 속에 염소 떼만이 우글거린다고 한다. 어렸을 적 살던 그 왕뎅이가 가끔 그리웠다. 몇 년전  왕등도에서 같이 살았던 당시 암을 앓고 있던 인석이 후배를 차에 태워 왕뎅이나 생각하자며 줄포에서 격포 변산으로 이어지는 해안선을 달리던 것도 하나의 추억이 되어 버렸다. 그 친구는 참 인정 많았고 무척 나를 따르던 동네 후배였다.


한 완력배의 협박으로,
왕뎅이로 이사

우리가 왕뎅이로 이사할 당시 사회는 혼란기였다. 당시는 광복 직후라 정치적으로 좌·우익간의 대립이 심했음은 물론 심지어는 거침없이 날뛰는 완력배들도 많았다. 우리가 왕뎅이로 이사한 것은 그 거침없이 날뛰던 동네의 한 젊은 완력배의, 할아버지에 대한 위해 협박 때문이었다.

광복 이듬해 봄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는 왕뎅이로 이사를 결심하고, 며칠 후 우리 집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영식과 길자를 남긴 채 할아버지, 증조할머니, 할머니, 나, 명식, 그리고 젖먹이 고모인 지숙이 여섯 식구가 이사 길에 나섰다. 지금 선운사 입구인 인천강 하구에 고기잡이 작은 목선에 짐을 실고 승선하여 떠날 때, 나의 넷째 대고이신 반암할머니가 떠나는 배를 보며 강둑을 따라, 울면서 따라오시던 그 광경이 어렴풋이 머리를 스친다.

난생 처음 바다에서 배를 타고 가는 것이 즐겁기도 했지만, 배 멀미에 고생했던 것도 잊을 수가 없다. 왕뎅이에 도착하여 선착장도 없는 해변에 연결한 널빤지 위를 걸어 내렸다. 비탈길을 따라 산등성이를 거쳐 우리가 살 집에 도착하였다. 지금 기억엔 우리가 살집은 산등성이 아래 계단식 밭 돌담을 따라 내려가면 동리의 왼쪽 끝에 있는 제일 큰 집이었다. 널따란 마당 아래는 절벽으로 마당 왼쪽에 있는 20여 계단을 내려가면 덕석 두 어장 넓이의 공간이 있는데, 절벽 밑 거기에 옹달샘이 있었다. 또 거기에서 조금 내려가면 바위에 부딛쳐 바다 물은 처얼석 처얼석 소리를 내고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바위에 서식하는 김을 채취하였다. 바위에 서식하는 김을 잘 긁는 애는 인석이었다. 그리고 나도 바위에 올라 김을 긁어내릴 때면 동생 명식은 “성! 조심해”라며 굵은 김을 받아 주곤 했다. 채취한 김은 마당으로 가지고 올라와 큰 소래에 김을 풀어, 그것을 다시 돗자리 위에 부어 말리면 그것이 바로 유독 구멍이 많이 난 왕뎅이 석태다.


하왕뎅이, 간재 선생이
제자 가르쳤던 곳

집에서 보면 앞마당 밑으로 전개되는 바다와 하늘이 마주 닿는 수평선 저 멀리서 가끔 고기잡이배가 지나가곤 했다. 그것은 흡사 한 폭의 그림이었다. 집 뒤의 길을 따라 섬 정상에 오르면 깍아지른 절벽 아래엔 검푸른 바다 물이 출렁거렸다. 언젠가 할아버지를 따라 그 정상에 올랐을 때  할아버지께서는 멀리 보이는 하왕뎅이를 가리키며 “저 섬은 상왕뎅이의 형제 섬이란다. 그 곳에서 간재(艮齋)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그 분은 평생 학문에 열중하신 분이다. 고창에도 중리 현곡(玄谷)장이 그 분의 제자다. 너도 그 분들 같이 공부 열심히 하면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해주시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끝없는 망망대해를 보면서 나도 공부 열심 해야겠구나 하는 마음을 갖던 것이 가끔 생각난다.


왕뎅이에서의 추억이,
수평선 너머로 떠오른다

우리 집 오른 쪽 나즈마악한 곳에는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말하자면 이들 집은 왕뎅이의 하나 밖에 없는 마을의 중앙 통에 해당되었다. 거기에 일수, 정혜. 인석이 등 여러 꼬마 친구들의 집이 있었기에, 나와 동생은 놀 때면 그 곳으로 갔다.

그 곳에 친구들이 모이면 자치기, 못 치기 등의 놀이를 주로 했다. 몸이 호리호리한 일수는 우리 보다 두세살 나이가 많았지만 모든 것을 잘 했다. 왕뎅이를 나와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일이 없지만, 일수가 누구보다도 항상 보고 싶었다. 어릴 때의 동심은 선해서 그런 건가, 나는 가끔 심원이나 격포에서 바다를 바라 볼 때도, 지금 나이 칠십을 넘었지만 왕뎅이에 얽힌 어린 친구들의 그 때 그 모습들이 수평선 저쪽에서 아련히 떠오르곤 했다.

동네 뒷 언덕에는 바위가 많이 있었다. 바위틈을 이리저리 위아래로 기어 다닐 수 있는 통로가 있었고, 그 틈새에 해조(海鳥)가 둥지에 알을 낳아 놓기도 했다. 우리는 그것을 주어다가 흙으로 쌓아 모닥불을 피우고 구어 먹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어른들이 바위 근처에 설치해 두었던 해조 잡이 홀롱개(오리 잡는 기구)에 걸린 해조를 잡아 오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 왼쪽 산등성이 동백나무 숲을 지나 남쪽 끝에 산신당이 있었다. 우리들은 누구의 지시도 없이 그 앞에서 풍랑이 일지 않고 복도 많이 주시라고 빌곤 했다.

왕뎅이 생활 중 먹는 것의 기억으로는 점심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점심은 여름은 하지감자, 가을과 겨울엔 고구마로 때웠다. 특이 할머니가 쩌 주시던 고구마는 지금도 기억에 남고 먹고 싶다. 그 고구마 크기는 어린애 머리만 했다. 그리고 찰지고 달았다. 항상 점심엔 고구마 3개 이상을 쩌 본적이 없었다. 3개 가지고도 우리 식구가 먹고도 남았다. 또 하나의 기억은 증조할머니가 마당에 수수대로 불을 피우고 그 가운데 자그마악한 오가리에 집장을 만들어 주시던 것, 그 맛은 있을 수가 없다.


할아버지 서당…
왕뎅이의 처음이자 마지막 서당

할아버지께서는 거처하시던 방에 ‘서당(書堂)’을 차리셨다. 학생이라야 나, 명식, 일수, 정혜 네 명이었다. 하루하루의 수업은 오전만 있었다. 수업내용은 한자교재 ‘천자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은 할아버지께서 원‘천자문’이 아니라 당신이 별도로 편집하신 것 같다. 그리고 습자였다. 습자는 분판에다 붓으로 연습했다. 내가 서산(書算)을 처음 본 것도 그 시절이었다. 할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신 서산은 글을 읽을 때 몇 번 읽는가를 표시하는 도구였다. 그 당시 우리 모두가 한자를 처음 배우는 기회였다. 나로서는 광복 때 초등학교 1학년이었지만 학교를 쉬고 왕뎅이로 들어갔으니, 서당 시절은 나의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교육의 시기였다. 우리들이 수학했던 서당은 왕뎅이 역사 이래 처음의 서당이자 마지막 서당이었다. 

내 어린 시절 왕뎅이 생활은 어찌 보면 내 학문적 생활에 영향을 준 것도 같다. 항상 무심코 바라보던 그 바다, 티끌 하나 없는 그 수평선, 그것은 내가 취하는 연구 방법에서 미시적인 것보다도 거시적 방법을 택하게 되고, 항상 거짓 없는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연구 태도에 영향을 준 것 같다. 그리고 할아버지로부터의 한자수업은 그 뒤 고향에 돌아와 만수당에서 2년간의 서당생활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나의 교육사 전공에 있어서 서양 보다는 동양에 중심을 두고, 지금 구상하고 있는 유교교육학(儒敎敎育學) 저술의 시도도 어찌 보면 왕뎅이 서당의 모태적(母胎的)인 영향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왕뎅이의 생활…그립고, 보고싶다
왕뎅이 생활에서 우리 형제 그리고 친구들 중, 우리 동네에서 같이 살던 용석 형이 떠났고, 3년 전 인석이가 떠났고, 그리고 작년 10월엔 또 동생 명식이 마저도 떠났다. 남아 있는 이사람, 올해로 어느새 칠십대 중반에 들어섰다. 언젠가는 떠나야 할 사람, 그래서 가끔 고독의 심연에서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왕뎅이 생활은 67년 전의 일이다. 이러고 보니 그 때 왕뎅이의 생활이 하나의 그림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가끔이면 심원, 격포 해변을 걷는 것도 왕뎅이의 생활이 그리워서일까. 그 산등성이, 그 동백 숯, 그 샘, 그리고 지금은 잡목만이 우거져 있을 그 집터를 보고 싶다.

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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