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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書院) ~ 한국인의 교육풍속 ⑤
연정 기자 / 입력 : 2011년 04월 12일(화) 11:31
공유 : 트위터페이스북미투데이요즘에

   

연정 김경식
연정교육문화연구소장

민간사학 서원…선현봉사와 후진양성 목적
서원(書院)은 조선중기 이후부터 보급된 민간 사학(私學)으로 선현봉사(先賢奉祀)와 후진(後進)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그러나 그 발전과정에서 이런 목적 외에도 학문발전, 사회교화기관으로서 큰 몫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한 정치와 관련되어 문벌의 대립과 붕당(朋黨)의 온상이기도 했다.
서원제도는 우리 고유의 것은 아니다. ‘서원(書院)’이라는 명칭은 이미 중국 당나라 때 나타났다. 당나라 현종 때(서기 754년) 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이 최초로 서원의 명칭을 사용한 예이다. 그러나 당시 서원은 일종의 관방(官方)의 정부기구로서 조정의 장서, 도서검열, 인재추천 등이 그 직능이었으며, 교육기구는 아니었다. 그러나 서원이 교육제도로서 활발하게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남송 때에 이르러서이다.

우리나라에서 ‘서원’이라는 명칭의 교육기관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세종 때였다. 즉, 세종은 유사(儒士)들이 서원을 설치하여 생도를 교육할 경우 포상하여 장려하게 하였던바, 실제로 전북 김제, 광주와 평안도 등에서 서원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서원은 단순히 교육의 기능만 수행했지,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선현봉사와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는 서원제도는 아니었다.


백운동서원이 시초…필자의견은 부안군 도동서원

선현봉사와 교육이라는 이중적 기능을 수행하는 서원으로 조선조 중종 37년(서기 1542년)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회헌(晦軒) 안향(安珦)선생의 사당을 순흥(경상도 영주시 순흥면―편집자주)에 건립하고, 그 다음 해(서기 1543년)에 사당 앞에 서원을 세워 강당을 마련하였다는 데서 그 시원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서원의 시원에 대해 필자는, 일반 학계의 의견과 달리 그보다 10년 앞선 서기 1534년(중종 29년) 부안현(현,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에 설립된 도동서원(道東書院)을 그 시원으로 보고 있고, 서기 1980년대초 한국교육사학회 년차 학술대회 때 ‘전북향토교육의 시론’이란 주제발표에서 주장한바 있다.

백운동서원은 서기 1550년(명종 5년)에 풍기군 후임 군수였던 이황이, 당시 관찰사를 경유하여 건의해, 명종은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액자를 하사하고 사서, 오경,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서적과 노비 그리고 전답을 주어 장려했다.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를 이룬다.

일반서원이 사액서원으로 지정된다는 것은 선현봉사와 교육사업을 하는 민간 교육기관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며, 이로 인해 사액서원에 국가의 재정지원이 있게 되었다. 따라서 당시로서는 피봉사자 개인적인 위치도 국가에서 인정받게 되어 본인은 물론 그를 배출한 가문, 서원으로서도 영광이었다. 이리하여 서원은 계속 증가세를 보여 숙종 때에는 한 도에서만도 8~90개소 정도에 이르렀다.


서원의 발달 배경…훈구파 약화되고 사림파가 우세하면서부터
서원의 발달 요인으로 물론 직접적인 도인(導因)으로 주자의 백록동서원에서 찾아야겠으나 여러 가지 요인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집권체제 정치세력의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는 몇 차례의 사화(士禍)를 거치면서 종래 훈구파의 계열이 약화되어가고, 대신 지방을 기반으로 하여 진출해 오는 사림파(士林派)의 세력이 점점 우세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사림파의 중앙정계진출은 향촌사회에서 대토지 사유화와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 토지 소유주인 지주와 임대받아 경작하는 전호가 있는 형식의 토지소유형태 ― 편집자주) 경영의 진전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4대 사화를 거치면서 정치기강은 더욱 문란해져 갔고 선비들은 관직을 버리거나 아예 단념하고, 서원을 서원 유생들의 결합장소로 삼는 동시에 그들 일족의 자녀교육을 실시하고 이를 통해 동족적인 당파의 결합을 굳게 하기도 하였다. 중종 말엽 내지 명종 대에 제한적이나마 약간의 발전을 본 서원은 선조 때에 들어와 사림계열이 정치의 주도권을 다시 잡게 됨에 따라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이에서 보듯 사림파는 서원의 주도세력이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연산군의 교육탄압정책에 따라 관학이 쇠퇴하고 새롭게 중종·명종의 흥학(興學)정책 이후 제왕들의 흥학정책은 계승되고, 문중·문하의 자의적 욕구, 과거풍토의 변화, 지방관·사림들의 교육열, 그리고 고려조 이후 면면히 이어오는 사학의 전통 등 여러 상황을 지적할 수 있디. 그런 의미에서 서원은 바로 시대적 산물이라 하겠다.


서원의 확대에 따른 순기능과 역기능

서원의 발흥으로 지방 사학기관의 기능을 다해 사문(斯文, 유교적인 도덕―편집자 주)이 진흥되고, 많은 교화사업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지방교육문고, 출판문화의 중심으로서 기능을 다 하였다. 그런가 하면 서원은 지방 사림의 집합소로서 또는 공론(公論)의 형성기관으로서 조선시대의 정치문화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서원의 증가와 특권화는 교육제도 면에서 향교의 쇠퇴 원인을 가져왔고, 중앙정계에 대해서는 붕당을 이루어 당쟁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또한 면세·면역의 특혜와 서원소유의 농장, 노비의 증가에 따른 군역 기피는 국가재정의 혼란을 초래하는 역기능적 측면도 간과할 수 없었다.

서원이 그 수적증가와 역기능으로 정치·사회적인 문제가되자 정부는 규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인조 22년(서기 1644)에는 서원의 설립을 허가제로 하였고, 이어 효종 8년(서기1657)에는 서원을 여러 곳에 설립하는 자는 처벌하는 규정까지 두었다. 정조 때에 계속 정비해 나갔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전국에 650여개 소나 되었다. 드디어 조선조 말 대원군은 전국 서원 및 사우에 대한 모든 특권을 철폐하고, 그 중 사회에서 모범이라고 인정받고 있는 47개 사액서원 및 사우만 남겨두고 모두 정비하였다. 전북에서는 오직 무성서원(武城書院, 정읍시 칠보면 소재)만이 유일하게 사액서원으로서 남게 되었다.

서원교육은 도학(道學)을 위한 것이었으나 당시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과거행사를 외면할 수 없었으니 과거준비 교육도 부차적으로 실시되었다. 서원은 자체의 임원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원장, 재장, 집강, 도유사, 장의, 색장, 직월 등이 바로 그것이다. 서원은 유회(儒會)를 통하여 사회적으로 막대한 권위와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유회는 서원의 전반적인 운영과 의결을 비롯해 각종 사회적 문제에 관한 재야 유사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공식화하는 거점이기도 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선현봉사 기능만 존속돼

서원은 윤리적 목적으로서 도덕적 교양인의 양성과, 현실적 목적으로서 관리양성교육을 그 교육목표로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두 가지 교육목표는 곧 경학(經學)과 사장(詞章)이라는 교육내용에도 투영되었다. 서원의 교과내용은 서원의 자율성 때문에 획일적이지 아니하였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성현의 서(書)나 성리지설(性理之說)이 아니면 읽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여러 서원의 교과를 종합해 보면 소학(小學), 사서오경(四書五經)은 필수적이며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 성리학 위주의 교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과거준비를 도외시할 수 없었으므로 이에 대한 것도 교육내용으로 추가 되었다.

서원에서 교육방법으로 강(講)을 통해 교수했다. 강은 학습한 문장을 암송하고, 그 의리를 문답하는 전통적인 교수방법이다. 강은 단순히 암송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리(文理)를 터득하는 일에 중점을 둔 활동이다. 원생들은 이 강을 통해서 글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였다. 강은 학습평가도 겸한 것이었다.

서원은 갑오 근대개혁이후 사학제도로서의 존재는 사라졌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서원의 기능 중 선현봉사의 기능은 존속되고 있어 그 유제(遺制, 예부터 전해오는 제도―편집자 주)는 연속성을 확보하고 있다. 오늘날 선현봉사(先賢奉祀)라는 기능을 계승하는 것은 형식에 치우쳐서는 안되고 그 보다도 중요한 것은 옛 선현들의 정신을 계승하여 현대 물질문명의 범람 속에서 기진맥진한 한국인의 정신과 도덕성을 순화하는데 좀 더 주의를 기우려야 할 것이다.

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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