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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樓亭)~ 한국인의 교육풍속⑥
연정 기자 / 입력 : 2011년 04월 19일(화) 15:59
공유 : 트위터페이스북미투데이요즘에

   

연정 김경식
연정교육문화연구소장

경관좋은 곳에 위치한 누정…고창 115개소
최근 고창문화원에서 『高敞 亭子文化ㅡ高敞邑 古水編ㅡ 제1집』을 펴낸 바 있다. 문화원장을 비롯해 편집에 관계한 모든 분들께 늦게나마 치하의 말씀을 드린다. 하지만, 이왕 편집하면서 누정에 관한 일반적인 소개의 장을 설정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턴데, 아쉬운 부분이라 여겨져, 여기서 그 내용을 소개코자 한다.

우리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듯, 산수의 경관이 좋은 곳이면 어디든지 누정이 있다. 전북의 경우 어느 대학 연구소 조사(서기 1985년)에 따르면, 총 489개소 중 고창지방이 115개소로 제일 많고 그 다음이 장수와 정읍이 각각 50개소이다.

누정은 우리의 전통적인 삶 속에서 중요한 생활공간으로서 기능을 해왔고 교육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누정이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의 합성어로서, 정자의 고유명사인 정호(亭號)에 누(樓)와 정(亭)자가 붙은 건물이며 주로 마루로 되어 있는 공간을 가리킨다. 그러나 단지 누각과 정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臺), 각(閣), 헌(軒), 재(齋), 정사(精舍) 등을 총칭하여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與地勝覽(여지승람)』 「누정조(樓亭條)」에서도 같은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堂)과 정사(精舍)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건물 구조적인 면에서 보면 당이나 정사는 사방 마루나 혹은 앞면과 양쪽에 마루가 있고 그 안에 동과 서에 방이, 그리고 중앙에 대청이 있는 경우를 말하고 있다. 또 하나 구별할 것은 전라도 지방에만 흔히 존재하는 모정(茅亭)이다. 이는 서민 특히 농민들의 휴식 공간이요 집회장소이며 농사일을 상의하고 농업노동(품앗이)을 편성하는 곳으로 농사철 서민들의 생활이 집약되는 공간, 즉 농촌공동체의 공간적 상징으로서 전근대적 사회에서는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해 오다가 근대화와 더불어 그 기능이 쇠퇴해 갔다.


누정의 유래와 배경사상
누정의 건축 기원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중국의 고대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궁궐 내에 정원을 만들면서부터 누정을 건축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누정의 수조(修造) 기원은 역시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록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삼국시대 초기까지 소급된다. 즉, 구전에 의하면 삼국시대 춘천의 소양정(昭陽亭) 자리에 이락루(二樂樓)가 있었다한다. 그리고 전남 광산의 양고동정(良苽洞亭)도 그 중수기를 보면 ‘이 마을의 고정(古亭)은 이미 삼국시대에 창간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한 것을 보면, 누정의 수축(修築) 시원은 삼국시대까지 소급할 수는 있겠으나, 예증할 수가 없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그러나 삼국시대 누정에 관한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여러 곳에서 보인다. 신라 실성니사함(實聖尼師晗) 12년조(서기 413년)에 신선이 누각에서 노는 곳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백제본기 개로왕 21년조(서기 475년)에는 궁실, 누각, 대사(臺射)를 장려하여 지었다는 기록들이 누정 건축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누정 건축의 배경사상은 신선사상을 중심으로 풍수지리사상이나 불교사상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의 누정 기록은 『고려사』에, 태조 원년(서기 918년)에 의봉루(儀鳳樓)를 지어 불교행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문종 10년(서기 1056년)에 태자와 여러 왕족들에게 동지누가(東池樓閣)에서 향연을 베풀고 시를 짓게 했다는 기록들이 누각 건축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리고 고려 말 조선조로 이르러서는 성리학적 선비사상이 중심이 되어지면서, 사회적인 변혁기에 접어들 때마다 많은 누정이 건축되기에 이르렀다. 16세기에 조선의 선비들은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탐구하고 성리학을 모든 삶의 전거(典據)로 삼았다. 서경덕(徐敬德), 이이(李珥), 조식(曺植), 김인후(金麟厚), 이황(李榥) 등 걸출한 학자들이 성리학의 심오한 경지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제각기 자연을 노래하고 여기에 동화된 정자나 정사를 건립하였다. 이와 같이 16세기에는 지방 각지에 절제된 선비정신과 성리학적 자연관이 건축으로 구체화된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다. 특히나 정치적인 면에서 사화(士禍)로 지방에 은거하게 된 많은 선비들은 대부분 신진 사림들이었으니, 그들은 16세기에 고향의 경승지를 찾아 학문과 휴식을 위해 많은 누정을 건축하게 되었음은 물론 이들 신진 사류와 인척간에 있다든지 학통을 같이하는 자들도 그들처럼 누정을 건축하여 누정의 발전기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향교, 서원 등의 유학교육기관과 함께 지방의 유학교육 및 시단(詩檀) 형성으로 그 경향은 점점 증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서기 1592년)과 병자호란(서기 1636년)에 많은 누정이 소실되었으며, 17세기 이후가 되면서 그 숫자는 감소하였다. 또한 18세기 중엽 이후부터 19세기까지는 더욱 더 많은 누정이 건립되어 우리나라 누정의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에 의하면 정자가 누(樓)보다 거의 두 배 정도 더 많이 건립된다. 이러한 추세는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신분제 혼란에 따라 경제력을 갖춘 많은 계층에서 사당(祀堂)을 짓는 것과 더불어 정자를 지었으며, 특히 대원군의 서원철폐와 맞물려 그 기능을 대신하는 강학소(講學所)로서의 누정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심화되어 다양한 기능이 첨가되어진다.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누정 중 대부분의 것은 이 시기에 건립되었다.


누정의 기능과 역할…향후 과제
누정은 기능면에서, 조선 초의 왕조 변동기나 중기의 사화, 임진왜란, 병자호란 후의 사회변동에 은둔으로 대처한 선비들의 성리학적 수기양성(修己養性)의 실천 수행 장소로서 더욱 중요한 의미와 함께 누정은 변함없이 상경유흥(賞景遊興)이 주된 기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와는 달리 사상적 시대변화로 말미암아 생긴 원칙적인 변화로서, 즉 유교적 실천윤리를 가르치기 위한 자체의 교육공간으로 누정을 이용하고자 하여, 생활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도록 하였으리라 여겨지며 또 직접적인 원인은 서원철폐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보여진다. 루(樓)와 정자의 이용행태는 주로 연회, 행사, 정사(政事), 강학(講學)을 위한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누정의 교육적인 역할에 주목해, 여러 가지 면모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누정은 일정기간 조선시대 교육기관 중 향교나 서원을 대신하여 교육을 담당한 비형식적 교육기관으로서, 학문연구와 토론의 장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누정은 정서함양을 위한 교육적 공간으로서 의미를 지녔다. 거의 모든 누정이 산과 강에 인접했거나 수묵이 우거진 곳에 위치하여 규범에 얽매이고 번잡한 곳에 있는 형식적 교육기관과는 달리 정서도야를 함에 있어서 더욱 적합하였다.

누정에서의 교육에는 누정과 관련된 많은 선비들이 참여하였고 또한 많은 인재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누정의 설립자는 물론이고 거기에 모이는 인사들은 성리학적인 소양을 풍부히 가졌던 선비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강론하고 토론하기도 하고 후진을 교육하여 지역사회 및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누정은 선비들의 평생교육적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녔다. 과거 성인들은 관료로서 또는 관직을 그만두고서 한가롭고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그들의 정신적 식견을 심화하고 미래 전망 등을 탐색하기 위한 시국에 관한 담론을 나누는 장소로 활용했으며, 또한 시를 읊고 서예를 하는 등 정서도야의 여가선용을 위한 장소로서도 활용하였다. 또한 누정은 사회교육적 의미를 지녔다. 이는 누정의 기능 중 향약 시행처로서의 기능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조선조 중기 이후 민간에 널리 보급된 향약(鄕約)이 사회교육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음에서 알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누정이 이렇듯 비형식적인 교육적 공간으로서 전통사회에서 향촌의 동몽들을 교육하고 향촌민의 교화의 역할을 다하여 향촌사회에 영향이 매우 컸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누정의 이러한 기능 내지 역할은 일부분에서는 현대사회까지 계속되고 있으나 보다 적극적인 교육의 기능 및 역할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우리사회에 제도적인 학교교육이 확립됨과 더불어 쇠퇴하여 갔다. 지금은 지역사회에서 누정을 보전·관리하는데도 몇몇을 제외하고 참으로 힘들기조차 한 실정이다. 우리의 전통 문화유적에 대한 그 정신을 이어가고 보전·관리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일이 아니가 생각된다.

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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