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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배운다는 것
나카무라 기자 / 입력 : 2011년 09월 26일(월) 13:28
공유 : 트위터페이스북미투데이요즘에

임진왜란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지만,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그 당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왜군은 1592년부터 거의 7년에 걸쳐 한반도 구석구석까지 진출하여 조선사람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당시 왜군에 의해 피해를 받지 않은 지역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앞으로도 계속 한국에서 생활하는 한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에 대해서는 하나라도 더 많이 공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어느 때부터 관련문헌을 열심히 모으고 있다. 지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의 기록을 읽고 있다. 그 책 속에 전라북도의 지역명이 너무나 많이 나오는 것에 놀랐다. 임진왜란 때 보다는 정유재란 당시 이곳 전라북도에는 더 많은 왜군이 진출해왔던 것이다.

처음 기세가 강했던 임진왜란 때와 달리 정유재란에 있어서 왜국은 조선반도에서 상당히 힘든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조선이 명장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을 수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우를 범했다. 원균(元均)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1597년 7월 15일 칠천도 부근에서 벌어진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에서 왜의 수군에 대패하였다. 이때 다이묘(大名)인 시마즈(島津) 군은 1597년의 8월에 남원, 임실, 전주, 익산을 지나 충남 부여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다시 삼도수군통제사(三軍水軍統制使)에 이순신이 임명된 후인 1597년 8월 27일 첫 전투인 어란포(於蘭浦)에서 왜군을 격퇴하였다. 이 전투로 이순신이 복귀한 사실을 안 왜군은 전라북도 쪽으로 남하하였다. 그 왜군의 루트는 충남 서천에서 김제를 지나 정읍이었다. 정읍에서 왜군의 다이묘(大名)들이 모여서 회의(1597년 9월)를 가졌다고 한다. 그 후 왜군은 장성을 지나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위의 책에 의하면 서해안에 접하는 우리 고창에 들렸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남편에 따르면, 정유재란 당시 고창현감은 문희개(文希凱)라는 분으로 1596년에 부임해서 정유재란을 맞이하였고, 그의 흔적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나온다고 한다. 그가 고창읍성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부상당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읍지와 선조실록에는 기읍퇴파(棄邑退罷)라 하여, 왜군이 쳐들어옴에 성을 버리고 달아나 파직이 되고 잡혀서 법으로 다스려 경계를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잘 모른다고 하였다. 하여간 위의 일본책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으나, 정유재란 당시에 이렇게 인접한 지역의 지명이 나오는 것만이라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정읍시에 필자의 일본 고향 도쿠시마(德島)의 다이묘인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가 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하치스카는 임진왜란 시작부터 7000명이상의 대병으로 참전했던 사람이다.
필자의 고향에는 ‘아와오도리’라는 일본에서 아주 유명한 춤 축제가 있다. 그 축제는 바로 하치스카의 허가로 시작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어서 일본에서는 나름대로 유명하다. 그런데 필자의 고향 다이묘인 하치스카가 이 전라북도까지 진출했었다니…. 만나면 안 되는 장소에서 내가 졸업한 학교의 교장선생님과 우연히 만나버린 느낌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파병된 왜군의 수는 20만 명을 넘었다. 그러나 1만 명 이상의 대병을 파병한 가도 기요마사(加藤清正)군은 45%가 죽었고,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군은 35%가 한반도를 침략했다가 죽었다. 또 왜군으로서 출병하였다가 이 전쟁이 잘못된 것이라 하여 조선으로 들어간 사람도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사야카(沙耶可)라 불렸던 경상도인 김충선(金忠善)이 있다. 사야카 14대 후손인 김재덕(金在徳) 씨는 사야카가 조상인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의 인생도 여러 가지였다. 유학지식 덕분에 높은 입장에 올라가거나 일본의 스님이 된 사람도 있다. 또한 도공인 전북 남원의 심수관과 충남 공주의 이삼평과 같은 인물은 일본 도자기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이끈 조선인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본에서 농사에 혹사되거나 수많은 토목공사에 노예처럼 일하다가 인생을 끝마쳤다. 임진왜란은 침략전쟁으로 한일 양국에 바람직하지 않는 형태이었지만, 이 전쟁으로 한일 간의 문물은 아주 활발하게 교류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으로서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늘 무겁고 기분이 우울해진다. 두 침략은 한국인들이 원하지 않은 가운데 강제적이며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국제교류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잘못된 한국침략의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척 하지 말고 제대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왜 그렇게 했는지? 다른 방법이 없었는지? 앞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임진왜란 400년, 한국독립 60년 이상 지났다. 우리는 더 밝은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역사를 배우고, 역사를 뒤돌아보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직접 부딪힌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는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의 힌트가 숨겨져 있다. 


나카무라 에미코(中村 惠実子) 씨는 일본어 강사와 통·번역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며, 고창읍에 살고 있다.

※다음은 이 글의 일본어 원본입니다

 

   

나카무라 에미코
(中村 惠実子)

歴史を学ぶということ

 

韓国人で豊臣秀吉の朝鮮出兵を知らない人はいないと思う。しかし自分の住む地域でその当時何があったという具体的な内容までは意外と知られていない。ほぼ7年秀吉の命を受けた軍は韓半島津々浦々まで戦線を伸ばし、韓半島に甚大な被害をもたらした。影響を受けなった地域のほうが少ないはずだ。 私は韓国に住む以上、「日帝時代」と「朝鮮征伐」に関しては、勉強しておいたほうが良いと思い、関連文献を集めている。

 

 現在は「豊臣秀吉の朝鮮征」という本を読んでいるが、その中に全羅北道地域の地名がよく出てくるのに驚いた。第一次出兵のときよりも、第二次出兵時、この全羅北道に多くの日本軍が押し寄せた。また第一次出兵とは違い、第二次出兵における日本の旗色は非常に悪かった。しかし朝鮮は名将と呼ばれた李舜臣を罷免し、元均を水軍の総司令に用いるという失策をおかした。1597年7月15日、元均率いる朝鮮水軍は漆川梁海戰で日本軍に大敗した。この時、島津の軍は1597年8月に南原、任実、全州を通って忠南扶余にまで攻め上がった。しかし再び、三軍水軍統制使として李舜臣が登用された後は、8月27日の於蘭浦の戦いにおいて日本軍は破れ、押し戻されて全羅道地域に退却してきた。そのルートは舒川を通って金提、そして井邑である。井邑では各地の武将が集まっての軍議がもたれた。その後日本軍は長城を通って南下するという道を選んだ。西海岸沿いの高敞には寄らずに過ぎていったようだ。夫からの解説によると、第二次出兵当時、高敞でも文希凱という人物による抗戦があったということが記録として湖南節義錄という文書に残っているそうだ。最後まで戦って負傷したととも言われているし、城を棄てて逃げたことで罷免されたともいわれているので、どちらが本当のことかは分からないが、ともかく私の持っている資料には高敞のことはでてこない。

 

朝鮮出兵に出てくるこの身近な地名だけでも驚きなのに、なんとその9月の井邑軍議には私の日本の故郷徳島出身の武将、蜂須賀家政まで混じっていた。この蜂須賀家政は第一次出兵のときから約7千人の兵を連れて参戦している。徳島には「阿波踊り」という祭りがある。祭りの期間には、徳島に約200万名以上の観光客が押し寄せるほどに有名である。この「阿波踊り」の始まりは、城の完成祝いに無礼講として蜂須賀家政が「好きに踊れ、無礼講じゃ」といったのが始まりだという言い伝えがある。そういう話でしか聞いたことがなかった故郷の殿様が、この全羅北道まで出兵していたとは驚いた。人には言えないような場所で、自分の学校の校長先生にばったり出会ってしまったような気分である。資料を探りながらそんな個人的な感傷に浸りもした。

 

この朝鮮出兵の兵隊の数は日本列島からは20万人以上である。一万人規模で派兵した加藤清正や鍋島直茂などがいるが、清正の兵の45%と直茂の兵の35%は第一次出兵において韓半島に散った。日本軍の兵として出兵しながらも、朝鮮側に寝返った武将も出た。慶尚道の沙耶可(金忠善)が特に有名だ。沙耶可の十四代目の子孫である金在徳氏は沙耶可の子孫であることを誇りにし、その素性をはっきりと語っている。日本に連れて行かれた捕虜のその後も様々である。朱子学の素養があるため取り立てられて高位に上った人間もいれば、日本の僧侶になった捕虜もいる。そしてまた、農作業に酷使され一生を終えた捕虜もいるのが事実である。

 

 侵略戦争という望ましくない形ではあったが、この期間における韓日の交流はすさまじいものがあった。こうして韓国で生きている日本人として、この秀吉の朝鮮征伐や日帝時代に関しては、どうしても口が重くなり、気も重くなる。どちらも韓半島の住民が望まない形での強制的な国際交流であったから。しかしそうであるからこそ、これに蓋をして見ないふりをするのではなく、きちんと歴史を見つめたいと思うのである。一体何故そうなってしまったのか。他に方法は無かったのか。将来的に例えば、こうした事態が起こったとき、私たちはどうすればいいのか。朝鮮征伐から400年、日帝時代の終了から60年が過ぎた。この先の未来が子供たちにとっていいものであるように誰もが願っている。その願いを実現するため、実際に私たちが今後どういう行動をとるべきなのか歴史から学ぶことは多い。私たちはより良い未来を創造するために歴史に学び、歴史を振り返るのだと思う。韓国と日本が直接ぶつかった歴史、「朝鮮出兵」と 「日帝時代」にはそのヒントがたくさん詰まっているのである。

나카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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